후속작이 있었군요.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시간이 충분히 흘렀기에 잊고 있었기도 했구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즐기며 마지막까지 상당히 집중해서 관람을 하였습니다. 늘 사전 지식 없이 영화나 이야기를 접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영화의 진행 속에서 의외의 인물이 등장하면 더 없이 좋습니다. '레이디 가가인가(?)'라며 혼자 궁금해하다가 화면이 밝아질 때에야 비로소 확실해지니 즐거웠습니다. 지극히 주관적 관점에서 이전부터 광기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정리#.1. 무시와 멸시
고담시티는 히어로물적인 판타지적 요소가 나와야 할 것 같은 곳인데요. 영화 조커는 이것과 거리가 있는 세계관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현실 세계에 있는 선한 기운은 최소화시키고 비합리성, 부조리의 극단만을 강하게 부각해 만든 곳입니다. 게다가 조커도 기존 조커의 맥(?)을 이어갈 법도 한데 전혀 다른 조커입니다.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조커가 광기 + 명석함(?)이라면, 여기서는 명석함(?)이 배제되어 있고 슬픈(?) 광기만 있는 조커입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며 학대의 대상이었고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도 방법이 없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내면서 주변의 '무시'와 '멸시'를 아무렇지 않게 느낄 수는 없을까(?), 이것이 가능하다면 삶이 한층 더 평화로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기에 살아내는 것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때로는 신분이, 때로는 직업이, 때로는 금전이 '무시'와 '멸시'를 하게하고, 당하게 합니다. 특히 직업은 귀천이 없다고 하여도 말만 이렇지 실상은 귀천이 있습니다. TED도 누가 보아도 떳떳한 일터에 종사하다 퇴직을 하고 나름 밑바닥에서 종사하고 있는데요. 부러 느끼지 않으려 해도 늘 느끼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바로 옆에 있는 패밀리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일터는 맞잖아'라는 핀잔을 늘 듣고 있습니다. 직접 해보지 않고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기에 안타깝습니다(본인이 아는 것만 보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스스로 그것을 깨닫기는 힘들죠). TED는 이러한 경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동안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도 많아 늘 새로운 세상에 있는 기분입니다. 특히, 가장 커다란 변화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밑바닥(?) 일을 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먼저 '안녕하세요', '고생 많으시네요'라는 인사를 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이분들의 노고를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리#.2. 짝
옥중 생활은 힘없는 슬픈(?) 광기의 조커에게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구조인데요. 감독님은 '짝'을 만들어 주어 조커가 일말의 '목적의식'을 가지게 합니다. '짝'은 약간 설명이 부족한 상태에서 마치 조커가 머릿속에 그린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는데요. 왜 '짝'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냥 맹목적인 동조자인지, 조커와 함께 산(?)을 만들고 싶은 동기가 부합되기에 '짝'이 되고자 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말미에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다고 '짝'이기를 거부하며 버립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동조 또는 부합하는 동기가 맞지 않는다고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버려지는 모습을 실 생활상에 견주어 보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살아 내면서 무수히 경험했던 사례가 떠오릅니다. 남녀 간의 관계나 일터에서나 벗들 사이에서나 살아낸 경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버려진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럽습니다. TED는 아직 그녀로부터 버려질 정도는 아니나(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근래에 구체적으로 버려졌을 때를 상상하곤 합니다. 같이 사는 것 같아도 위기가 오면 혼자가 될 것이거든요.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결국은 본인이 책임을 지거나 감수하며 살아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득 벌이가 시원치 않다는 원망 어린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정리#.3. 전환 수단
이야기는 코미디 극장쇼에서 볼 법한 공연과 버무려져 시간을 보내게 하면서 '아서'를 천천히 사형으로 몰고 갑니다. 교묘하게 관객은 사형이 아니길 바라게 만들지만 그 뜻을 저버립니다.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니 국면 전환은 방화나 폭파로 밖에 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사랑(?)에 빠지게 하기 위해 불을 지르구요(조커가 지른 게 아닙니다), 유죄 선고의 순간은 법정을 폭파시켜 버립니다(이것도 조커가 터트린 게 아닙니다). 그래도 폭파 장면에서는 나름 뒤에 이어질 흥미진진한 히어로물적인 판타지 이야기로 이어질까(?)라는 기대도 해보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삶의 전환점을 만드는 수단은 무엇일까요. 영화에서처럼 극단적인 전환 수단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살아내면서 느껴본 바로는 순간의 선택으로 대략 10여년이 지나간 후에야 '아 그때가 전환점이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전환점이라고 생각해 보아야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지는데요. 한참을 지나 보내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무엇을 할 때에 조급함이 이전보다 많이 덜 합니다(극히 주관적입니다).
정리#.4. 더 없어?
마지막 장면에서 꽤나 허탈합니다. '아서'가 뭔가 나름의 돌파구를 찾는 기대를 했었는데요. 옥중 이야기의 흔한 스토리 소재로 조커는 같은 재소자에게 칼침을 맞고 쓰러져 버립니다. 대략 감으로 더 해줄 이야깃거리가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여기서 '아서'가 죽어 버리면 더 이상의 후속작은 없다는 생각에 많이 아쉬웠습니다(자막 올라갈 때에 스크린이 멈춰있고 눈을 감지도 않았으니 살아 있겠지요?). 호아킨 피닉스의 다른 연기를 기다려야 하나 봅니다.
광대는 광대일뿐입니다. 죽어도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지요. 우리 모두가 광대일 수도 있습니다.
Folie a Deux의 뜻을 ChatGPT에게 물어보았습니다.
"Folie à deux"는 프랑스어로 "둘이 함께하는 광기" 또는 "공유된 정신병"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에서는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비슷한 망상이나 비현실적인 신념을 함께 경험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보통 이들 중 한 사람이 주도자가 되고, 다른 사람이 그 망상이나 비현실적인 생각에 동조하면서 이를 믿게 되는 형태입니다.